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산리 전투 (문단 편집) == 인터넷상에서의 논쟁과 시선 == 당시 기사화된 한일 네티즌간의 논쟁.[[http://blog.naver.com/kage1/20008265895|#]] [[인조이재팬]] 시절에 인조이재팬을 투기장으로 둔갑시킨 분기점이 청산리 전투에 관한 논란이다. 당시 일본의 [[네이버 총독부]]를 위시한 네티즌들은 [[대본영|일본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를 근거로 한국 측이 주장하는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결과는 반대였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에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한 총포를 노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한국 측 주장대로 네 자리수 인원이 전사했는데도 모든 전사자를 안치하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다. *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당시 일본군 연대장 가노가 이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 3,000여 명이나 전사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 연대들이 증원도 받지 않고 추격을 지속했다. * 3,000여 명이 사망한 특기할 만한 결과인데도 어느 곳에도 기록이 없다. * 청산리 전투 패잔병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일본군의 복식[* 1932년에 제식화된 군모(태평양 전쟁영화을 보면 흔히 보는 그것)와 98식 군복 등.]이 1930년대 이후의 것으로 해당 사진은 청산리 전투의 사진이 아니라 [[중일전쟁]] 시기에 찍힌 것이다.[* 그동안 복식을 근거로 대한민국에서 중일전쟁 시기 사진으로 추정해 왔는데 2020년 동북아역사재단 등 대한민국의 학자들에 의해 1938년에 발간된 지나사변화보 68호에 실렸던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6468|1997년에 작성된 청산리 대첩 문서에 그 사진이 있다.]][* 해당 문서는 과거 한국인들의 주장이자 해당 논란이 붙거졌을 때의 한국인들의 인식을 그대로 담았다. 들것 사진을 포함해 연대장 전사와 같은 주장들이 있으며 이는 한국에서는 정설이었고 교과서적인 내용이었으나 이런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들을 가지고 토론에 임했다가 반박을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의하면 독립기념관에서 받은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해당 사진의 출처가 밝혀짐에 따라 수정 요청을 받아들여 2023년 6월 중순에 해당 사진을 삭제했다.] 당시 이 사진은 한국의 전쟁 박물관에도 관련 자료로서 전시되고 있었고 한국 측에서는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해프닝으로 끝날 오해였지만 타격이 컸다. 거기에 편승해 기존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반감을 품은 --혐한일뽕-- [[한국인]]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로 청산리 전투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독립 전쟁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당시 독립운동가 등이 윤색,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독립군의 전과가 [[신문]]이나 사료마다 중구난방이다. * 청산리 전투 관련 연구 사료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계속해서 감소하였다. * 한국 측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도 나온다. *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1916)|김학철]] 선생의 자서전 '우렁이 속 같은 세상'등의 저서에서 항일 무장투쟁사가 과장되거나 부풀려졌다고 지적했으며 하루하루 힘들게 싸우는 무장투쟁 운동가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 과장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는 언급이 나온다. 더불어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도 자서전에서 청산리 전투가 과장됐을 거라는 언급을 남겼다.[[http://egloos.zum.com/parizal/v/4174693|#]] * 독립군이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으며 일본군의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 인터넷 등지에서 [[북로군정서]]의 사진 혹은 청산리 전투 직후 기념 승전 사진이라고 출처불명의 사진이 돌아다니는데 이 사진은 여러 사이트와 다큐멘터리, 자료집에 청산리 전투 직후 승전 사진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신효승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출처가 불분명하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119&aid=0002427380|기사]][* 사실 독립운동사를 심도 있게 파던 사학과 전공자들에게는 이미 출처가 불분명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 사진으로 위의 중일전쟁 사진과 함께 과거부터 의문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었던 사진이다. 이 사진은 청산리 전투 시기 사진이 아니라 이전에 국내에서 독립운동하던 시기의 사람들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도 신원을 알 수 없는 인물인데 어느새 김좌진으로 둔갑해 버렸다.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과 격전 끝에 독립군이 크게 한바탕 싸우고 전역에서 회피하던 전투로 한가롭게 기념 사진을 찍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3명밖에 죽지 않았는데 [[간도 참변|군사 25,000명을 간도로 끌고와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청산리 전투와 간도 참변의 인과 관계 자체가 불명확하다는 반박을 받았다. 기존 역사 교과서나 민족주의 사관에서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보복으로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고 주장했지만 간도 참변이 시작된 날짜는 청산리 전투(10월 21일 시작)의 이전인 10월 9일부터 약 27일간 지속되었으므로 모순이 발생한다. 또 일본군이 적게 죽었으니 토벌군을 적게 투입하고 많이 죽으면 많이 투입한다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도 의문이다. 테러범 몇 명을 수색하고 잡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인원이 동원되거나 유해 조수를 잡기 위해 전국적 규모의 구제 사업을 하는 등 투입 자원은 당국의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피해자 수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2004년부터 2005년 경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의 네임드 유저였던 '고람거사'가 기존 사관으로 일본인과 맞섰다가 패퇴했으며 같은 시기 [[서울대학교]] 교수 [[이태진]]이 인조이재팬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넷 우익]]한테 대패[* 단 이태진의 경우 청산리 전투가 아닌 [[을미사변]] 관련 떡밥이었다.]하면서 인조이재팬의 한국인과 한국사 사이트의 분위기는 초토화되었다. 네이버 총독부의 활동이 더 활발해짐은 물론이요 한국의 [[일뽕]]과 [[국까]]들도 이에 물타기에 돌입했으나 '고람거사'는 기존의 네이버 총독부에서 자료로 들었던 일본 후생성의 문서가 날조된 자료라는 사실을 파악했다면서 이 점을 들어 반격에 나섰다. 네이버 총독부에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말 돌리기에 들어가 싸움은 한국 측 승리로 간주될 뻔했으나 익일 일본 측에서 후생성에 직접 전화해 문서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고람거사는 일본 측이 논거로 드는 후생성 사망자 명단보다 실제 사망자가 많다는 일본 측 자료를 보고 반격에 나선 것인데 실상은 고람거사가 '사상자'를 '사망자'로 혼동한 탓에 나온 [[오해]]였다. 이 부분은 당시 활동하던 역사 사이트 회원 일부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인터넷상에서는 이전 패배만큼 주지하지 않았으나 해프닝에 가까운 이유로 어이없게 패배한 사례라서 역사 사이트에서 인조이재팬을 언급하면 이것을 금기로 다루거나 분노에 휩싸이곤 했다. 논쟁이 발생한 지 15년도 더 넘었지만 한국 역사학계는 일본인들이 제시한 대외비를 비롯한 실제 자료들과 지표에 대해 반박을 내놓지 못한 채 박은식의 주장이나 신문 기사만을 인용하고 있다(대표적으로 신용하 서울대학교 교수). 단, 신용하 교수는 옛날 이론을 아직도 고수하면서 자기 전공 분야뿐만 아니라 고대사까지 건드려 입지가 좋지 못하다.[* 점잖게 서술되어 있어서 그렇지 [[환빠]]적 요소가 매우 짙은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이란 사설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 보니 스페인 현지 언론에서도 [[유사역사학]]이라며 성토하는 보도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몇몇 사람들에게 기존 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는 등 [[나비효과]]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논쟁의 전말과 논쟁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 솔직하게 공유되고 합리적으로 탐구되지 않는 한 기존의 사관만을 가지고 일본 측 주장을 접했을 때 정반대로 [[주화입마]]하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날 것으로 우려된다. 한편 이 싸움은 [[한국사]] 포럼 및 사이트에 '''쇄신의 필요성'''을 환기하기도 했다. 당시의 논쟁을 보면 '''한국 측엔 학술 논쟁을 하면서 [[논문]]을 인용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대한민국에는 민족주의 사관으로 서술된 [[교과서]]를 베이스로 한 막연한 사관밖에 없었던 데다 엄격한 사료 비판을 이용한 논쟁을 한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사료를 기반으로 매사 명명백백히 검증해서 제3의 국가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토론에서는 연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또 10대에서 20대가 절대 비중을 차지하던 이용자와 달리 일본 측은 30대에서 50대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참여했다는 점도 반성할 점으로 꼽혀 고연령층에서도 인터넷을 활용한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비판이 대두됐다. 그러나 이후 [[역사 갤러리]]가 붕괴되고 역사 사이트는 분화하고 군소화하면서 이런 논쟁의 장은 좁혀졌으면 좁혀졌지 넓어지지는 않아서 쇄신 분위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제대로 된 토론을 위해선 논문과 1차 사료들을 베이스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게 성과라면 성과. 한국사를 탐구할 때 독립운동 당시 사기 진작을 위한 일종의 선전과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민족 사관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고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주장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억지로 키우기보다는 사실에 근거한 서술을 하되 열세의 전력과 상황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한 독립군의 의의를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주류, 재야 같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학설들과 학자들이 하도 설쳐서 청산리 대첩처럼 과장되거나 왜곡된 주장, 사실들이 아직까지도 상당히 많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전투 결과가 일본 측 기록과 같다고 해도 전투에서 소기의 전술적 목적을 이룬 쪽은 독립군 측에 가깝다. 조직을 온존하여 이동하는데 성공하였고 포로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추격전의 목적 달성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봐도 된다.[* 만약 충분한 목표를 달성했다면 추격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일본군 전사자가 적다고 해도 저 전투 결과는 상부에서 문책을 하면 했지 칭찬을 받을 결과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1919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일본군의 대대적인 연해주 일대 [[연해주 4월 참변|항일 세력 토벌 작전]]의 일환에서 발생한 작은 무력 충돌에 불과했으며, 청산리 전투를 끝으로 일본군은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을 일소하는 데 성공한 반면 여러 군소 조직으로 이뤄져 있던 독립군은 그간 어렵게 다져 온 본거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약 8개월 간 이곳저곳을 떠돌다 [[자유시 참변]]으로 몰살당했기 때문에 전략적 관점에서는 일본의 작전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또 봉오동-청산리 전투 후 벌어졌던 [[간도 참변]]도 연해주 참변의 연장선에 있었던 토벌이었지, 단순히 패전해 대한 분풀이로 저지른 학살은 아니었다. 교과서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전과는 언급하지 않고 청산리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의 토론 주제는 '일본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청산리 대첩이 대첩이냐 아니냐'였기 때문에 논쟁에서 주장을 관철당하고 이렇게 최소한의 의의를 찾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만큼 '''기존 사관에서 후퇴'''한 건 사실이라는 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